가수 한대수 아버지 촉망받던 핵물리학자, 실종, FBI 발견, 세시봉, 전처와 현아내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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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특별수사대

가수 한대수 아버지 촉망받던 핵물리학자, 실종, FBI 발견, 세시봉, 전처와 현아내 동거

by 스캔들 특별수사대 202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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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한대수 모르는 분이 있나요. 예전에 어떤 매체에 나와서 본인의 근황을 소개하시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본인 트레이드 마크인 장벌은 여전히 하고 계시더군요. 아내는 아주 어렸던 외국인으로 기억되는데, 엄청 열정적인 삶을 살고 계시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밥 빨래 집안일, 아이 등교까지....

 

부산 부유한집, 포크록 대부, 한국의 존 레넌, 한국의 밥 딜런, 한국의 마지막 히피, 한대수.

 

한국 음악계의 큰 획을 그은 선도적 아티스트이자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 특히 70년대에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악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포크록의 시작이자 대부이자 대명사로 걸걸하고 촌스러우면서도 깊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한대수입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이자 마지막 히피 한국의 존 레넌 한국의 밥 딜런 등으로 불립니다.

 

그런 한대수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거쳐왔습니다.

대저택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기도 했고 불과 며칠 만에 빈민가에서 굶주린 생활을 하기도 했죠.

 

또한 그의 가족에게는 영화와 같은 슬픈 사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외도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했던 한대수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한대수는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납니다.

1974년 '물 중 주소'와 행복의 나라 등이 수록되어 있는 1집 앨범 '멀고 먼 길'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지만 이미 1968년부터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등과 함께 세시봉에서 활동합니다.

 

송창식은 한대수를 진정한 히피 이라고 평가했고 자유로운 노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대수는 명문 집안 출신입니다.

 

가수 한대수 썸네일
한대수 이미지

 

한대수 할아버지가 1930년대 흔치 않았던 미국 유학생이었죠.

 

또한 한대수의 아버지 역시 굉장한 엘리트였습니다.

서울대 공대 재학 중 당시 아들의 백일 잔치를 하고 나서 핵물리학 분야 최고 명문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장면을 지켜본 한데스의 할아버지가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핵물리학자가 되라며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연구를 하다가 실종이 됩니다.

이 실종 사건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때가 한대수가 7살 되던 때였고 결국 한대수 어머니는 재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대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랍니다.

이렇게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한대수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FBI가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롱아일랜드에서 인쇄업을 하는 사업가로 살고 있었던 것이죠.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생각하는 외모만 동양인이었어요.

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죠.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했는지 우리 말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또한 아버지는 미국인 여자와 가정을 꾸렸고 아이가 9명이 있었습니다.

 

총망받는 핵물리학자가 하루아침에 직업과 신분을 바꾼 것도 이상하지만 성년이 되어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이상했습니다.

 

돌아가시지 않은 게 다행이죠.

지금도 핵가지고 저 난리들을 치잖아요.

그건 매우 불행한 국가 간의 일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실종 사건은 한국과 미국에서 아마 영원히 봉인되겠죠.

 

아버지는 자신의 실종 사건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 소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영어로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미래를 생각합시다라고 말했죠.

 

한대수는 아버지가 핵무기 개발에 중요한 인력으로 일한 뒤 그 기술을 한국에 가져갈까 봐 브레이어신 즉 특정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을 당해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지 않았나 예측했습니다.

 

한대수는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합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 히피 문화를 깊이 받아들였죠.

한 때 사진에 심취했던 한대수는 1968년 스물한살에 한국으로 돌아와 세시봉에서 활동합니다.

 

당시 포크록은 번안곡 위주였는데 한대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국내에 알렸고 또 한국 최초의 히피라는 칭호도 받습니다.

 

한국에서 외삼촌이 와서 보시고는 너무 한심하니까 나에게 이발비 100달러를 주시더군요.

그리고는 엄마에게 알렸어요. 결국 엄마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죠

 

큰 사업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제가한 뒤 서울의 큰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 별채에서 한대수는 기타 치고 작곡하면서 용돈도 많이 받으며 아주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 한국에 와서 음악을 한답시고 막 돌아다녔죠 그렇게 해서 김민기 양희은 씨가 내 노래를 불렀어요.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 말이에요. 이렇게 한대수의 노래가 서서히 알려졌고 한대수 역시 싱어송 라이터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당시 한대수의 여자친구는 탤런트였는데 이 별채에서 엉켜 있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그대로 쫓겨나고 맙니다.

이렇게 한대수는 미국의 할렘가에서 한국에 대저택 다시 한국의 판자촌으로 전전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노래 '고무신' '물 좀 주소'를 만들게 됩니다.

한대수는 제대 후 그동안 작사 작곡해 두었던 물중 주소 행복의 나라 등을 실은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한대수의 1집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75년 발표된 이 집 고무신의 전국이 체제 정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전량 회수되었고 판매 금지를 당합니다.

 

그리고 2집의 영향으로 이전에 발표되었던 1집 역시 활동 금지를 당하게 되고 결국 생계가 막막해진 한대수는 아내 김명신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본처와 현재 아내, 한대수에 놀랍고 충격적인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 스토리. 전처와 현 아내와 함께 기이한 동거 까지

 

한대수는 아내 김명신을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무명 시절에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마음이 끌렸고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던 혼전 동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대수는 갑자기 입대 영장이 나왔고 김명 씨는 그런 한대수를 3년 동안 기다립니다.

 

미국에서 그는 사진작가로도 활동했고 록밴드 칭기즈칸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었고 그녀의 작품들은 미술 잡지에도 실릴 정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 대수는 사진 작가로 김명 씨는 디자이너로 생활이 안정되어 갈 무렵 한대수가 그만 외도를 하고 맙니다.

명신과 지낸 지 14년 만의 일이었어요.

명신의 동료 디자이너 보니를 만났고 그만 사랑에 빠졌죠.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명시는 한대수를 버리고 떠납니다.

당시 명신는 커다란 흰 벽의 검은 붓글씨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써놓고 집을 떠났어요.

결국 제가 명신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고 다행히 명신은 다시 저를 받아들였죠.

하지만 이 사건은 다시 5년 뒤에 터집니다.

 

포크록 대부 한대수 썸네일
백발 장발 한대수

 

이번에는 명신이 이혼을 요구했어요.

명신이 5년 전 일을 입에 올렸는데 사실 그것은 변명일 뿐이었고 명신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던 것이죠.

 

결국 김명신은 독일인 모델과 재혼을 하면서 한대수의 곁을 떠납니다.

김명신과의 이혼으로 한대수는 정신적인 타격을 크게 받습니다.

사랑을 나눌 때 문제가 있어 아내가 자신을 떠난 것은 아닐까 자신 때문에 결혼 생활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심할 때는 삶을 포기할까? 라는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즈음 만난 게 현재의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입니다.

당시 한대수는 44살이었고 옥사나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전처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옵니다.

 

몇 년 만에 명신의 전화를 받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독일인 남편과 별거 중인데 독일 경찰서에 있다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더라고요

20년 동안 당신의 아내였지 않았냐면서요.

명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망설이다가 옥사나에게 명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했어요.

 

전처에게는 이혼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졌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전처와 현 아내와 셋이서 살게 됩니다.

 

현 아내 역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같이 살았던 아내인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잖아요. 라며 함께 사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결국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전처는 후에 이들 곁을 떠나 홀로 독립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에서도 그의 노래가 조명받으며 한대수의 국내 활동 분위기가 조성되고 옥사나 역시 아이를 가지기 위하여 바쁜 증권 회사를 청산하고 둘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부부는 2007년 딸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행복을 찾을 것 같던 한대수였는데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아내 옥사나가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인 것이죠.

 

옥사나의 알코올 의존증은 20년 넘는 지병이에요. 점점 더 심해졌죠. 그녀의 어머니와 삼촌 역시 알코올 의존증으로 세상을 떠나는 가족력이에요.

중독은 치료가 잘안되는 병보다 무서운 거예요.

 

아내는 딸을 직접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기에 결국 한 대수가 딸과 아내를 직접 돌봐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대수는 세상을 달관한 듯 이 모든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한대수는 여전히 미국 뉴욕에서 한국의 록 음악을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록으로 뉴욕 음악계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외도와 이혼 이후 재혼과 더불어 전처와 현 아내와 함께 기이한 동거까지 그의 인생은 참으로 다사다난했습니다. 그가 아내와 딸과 함께 오래오래 건강을 지키며 행복한 시간 보내길 바라겠습니다.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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