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해설가 하일성, 제11대 KBO 사무총장, 후대를 위한 야구장 건설 첫 삽도 못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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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특별수사대

야구 해설가 하일성, 제11대 KBO 사무총장, 후대를 위한 야구장 건설 첫 삽도 못 뜨고...

by 스캔들 특별수사대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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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하일성은 금남의 100억 빌딩을 야구장 건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필당을 내놓았는데, 판매대금도 못 받고 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정밀이지 마음 고행 엄청나게 하셨어요. 입담이 능하고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았던 고 하일성은 허구연과 더불어 대한민국 야구 해설 계에서 전설로 평가받으며 아직 방송 해설 계에서 일을 이어나갈 후계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고 평가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 하일성의 인물탐구 시간을 함께해주세요.

 

베트남 파병, 제자를 아내로, TBC 야구 해설가 인생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야구계에 전설이 된 하일성 하일성을 추억하며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

어째서 그는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알아봅니다.

 

육사 9기 출신인 예비역 장성이었던 아버지와 백화점에서 의주 물건을 판 매장을 운영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하일성은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가정에서 살았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께서 결별하게 됩니다.

 

한순간에 가정이 깨지면서 하일성은 어린 시절 외가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동안 방황하며 주먹질하고 말썽을 피웠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불량 동아리에 가입도 했습니다.

 

그나마 야구를 시작하면서 주먹 대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분노와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야구를 안 했으면 상당히 못된 길로 빠졌을 것이라고 회상" 했습니다.

 

1967년 경희대 체육학과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하지만 고된 훈련과 부상 때문에 일찍이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대신 체육교사 교직과정을 이수했습니다.

 

1968년 2월 육군에 입대한 후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20달러 지폐 다섯 장을 아들의 손에 쥐여주며 베트콩에 포로로 잡히면 이 돈이라도 주고 살아올 수 있으면 살아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월남 파병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인 1974년부터 그는 경기 김포 양곡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때 제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술을 좋아했던 하일성은 양조장의 동료와 술을 마시러 종종 다녔습니다.

 

한 번은 학부형이기도 했던 훗날에 장모와 술자리에서 합석하게 됩니다.

이때 술기운에 한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되는 기막힌 사연의 인연이 됩니다.

 

썸네일
하일성 마이크 잡고 강의

 

"어머님, 딸 대학 보내면 뭘 할 거예요. 나도 외롭게 자란 사람인데 따 고생 안 시키겠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는데 장모는 흔쾌히 "그럼 그럽시다" 라고 맞받아치면서 급진전합니다.

 

그렇게 처가에 결혼 허락을 받고 다음 해 2월에 졸업한 아내와 그의 6월에 약혼하고 10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일성은 아내가 결혼하고 3개월까지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니 이후엔 야라고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서울 환일고등학교에 재직하던 1979년 KBS 배구 해설 위원 오관영의 권유로 TBC에서 야구해설위원으로 입문했습니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되자 자동으로 KBS 야구해설위원이 됐습니다.

방송 내빈으로도 많이 나올 정도로 만담이 능하고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았던 고 하일성은 허구연과 더불어 대한민국 야구 해설 계에서 전설로 평가받으며 아직 방송 해설 계에서 일을 이어나갈 후계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고 평가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명 해설가이자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이끈 행정가였던 그는 우리 곁을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가족 지인 야구 애호가들까지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설이 된 하일성을 추억하며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 어째서 그는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배구 해설 KBS 위원 오 건으로 TBC에서 야구해설위원으로 임문 했습니다.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흡수되자 자동으로 kbs 야구해설위원이 됐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하일성은 야구해설가로 완전히 변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구수한 입담과 명쾌한 해설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일성은 과감한 예측 해설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예측이 틀리거나 빛나가면 야구 몰라요 역으로 가느냐는 야구의 명언으로 유명합니다.

변화무쌍한 야구 승부는 언제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의 실수를 방어했습니다.

 

야구는 9회 말 2 아웃 부터!

야구는 9회 말 2 아웃부터!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인데요.

나중에 수필 "철학자 하일성의 야구 몰라요 인생 몰라요"출간하기도 했습니다.

 

해설위원으로 주가를 한창 올리던 중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년 340일 이상 함께 하던 술과 하룬 루대가의 흡연으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세 번의 수술과 공황장애 우울증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금연에 성공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2006년 5월까지 활동하면서 MBC의 야구해설위원인 허구영과 양대산맥을 이루며 전설이 됩니다.

재치 있는 입담과 푸근한 인상 때문에 가족 오락관, 아침마당 등 TV에 출연하며 방송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그는 2006년 5월 24년간 잡았던 마이크를 놓고 제11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야구 국가대표팀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때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준우승할 당시 야구단 단장을 맡았습니다.

 

하일성은 총장 임기를 마친 후 이때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회상하며 자신이 나중에 세상을 떠나면 묘비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야구 대표팀 단장이라고 새겨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2009년 10월 한국 시리즈의 단 두 경기 중계를 위해 임시직이지만, 다시 방송에 복귀했습니다.

2010년부터 스포츠 케이블 방송인 KBS N 바퀴살의 야구해설위원을 맡았으나,

2014년 KBO 시즌 이후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후 하자 했습니다.

 

야구계를 떠난 하일성은 야구계가 아닌 곳에서 여러 구설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서울 강남에 100억 원대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야구를 위해 100억대 빌딩을 내놓다, 부동산 사기를 당하다. 그 후 삶을 스스로 포기한다.

 

 

어느 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부동산 업자에게, 빌딩 매각 권유를 받고 그에게 인감과 부동산 매각 관련 서류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사기를 당해 빌딩 매각 대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양도세 등 약 10억 원의 세금만 떠안았습니다.

하일성은 체납액 중 6억 원을 냈으나 부족한 4억 원을 갚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세금을 해결하고 나니 이번에는 사채업자의 불법 추심에 시달렸습니다.

공중파 해설을 그만둔 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 됐습니다.

 

하일성은 집을 팔고 월세로 옮겼고 사용하던 외제 차도 팔고 렌터카를 이용했습니다.

 

이후 이 빌딩을 매각한 이유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그것 위해서 야구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를 듣고 야구장을 짓기 위해 빌딩을 내놓았던 것이라고 전해져 더한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또한 2014년 하일성은 지인 박 모 씨에게 3천만 원을 빌렸다가 변제 기일을 차이 피일 미루다가 이듬해 사기 혐의로 고소도 당합니다.

 

검찰은 그가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이후 3천만 원을 모두 갚았다는 점 고려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2016년 7월에는 아내가 면허 취소 수준인 음주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를 냈고 함께 탄 하일성 또한 방조 혐의로 입건됩니다.

 

그는 지인의 아들을 프로야구단에 입단시켜 달라는 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해당 아들이 결국 프로야구단에 입단하지 못하자 지인이 사기 혐의로 고소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검찰 관계자는 하일성이 '청탁용으로 받은 돈이 아니라 빌린 돈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여러 일로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고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던 그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하일성은! 2016년 9월 8일 자신이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이미 목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습니다.

 

하일성은 극단적 시도 전 사랑한다. 미안하다 등의 문자 메시지를 작성해 부인에게 전송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부인에게 전송되지는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하일성의 지인이라는 김 모 씨는 하일성 씨가 건물 사기당해서 전 재산 날리고 아내 소유의 전원주택에 압류돼 아내에게 엄청 미안해했다.

 

방송이나 광고를 못해서 돈이 나올 데가 없었다며, 최근에 악재가 겹쳐서 굉장히 힘들어했다.

일주일 전에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생을 끝내고 싶다는 말을 엄청 많이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하일성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그에게서 온 "3천만 원을 빌려달라'는 문자를 보여주며, 하일성이 그에게 "내가 예전엔 재산도 있고 평판도 낮지 않았는데 요즘엔 내가 돈을 빌리려 하니 사람들이 안 만나줘서 무척 자존심이 상한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CCTV가 공개되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담배를 입에 문 그는 초조한 듯 주변을 배회하더니 거리에 놓인 의자에 앉습니다.

쓸쓸한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후 방송 "궁금한 이야기 Y"에서 하일성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내용이 그려졌습니다.

 

제작진은 자신의 사무실 근처를 배회하며 고뇌하는 표정을 짓는 하일성의 CCTV 모습을 공개하며 조금씩 주변을 정리했던 하일성의 행적을 따라갔습니다.

 

하일성이 해설할 수 있게 TBC에 추천했던 전 배구의 설과 오관영은 당시 야구 경기를 중계하던 사람이 하루만 하고 관뒀다.

 

TBC서 아무나 데려오라며 급하게 야구해설가를 구했는데 그가 생각나 추천했다며 늘 재치 있는 입담을 뽐냈던 하일성을 추억했습니다.

 

하일성의 소속사 대표 김 씨는 하일성의 마지막 유서가 담긴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유서에는 명예 실추 때문에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김 씨에 수습을 당부하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살았던 그가 단지 경제적인 이유로 안타까운 선택을 했다는 게 많은 팬을 슬픔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입담을 들을 순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야구를 사랑한 인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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